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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벨기에

서랍8-1) 벨기에 - 농담이 진짜가 되었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12. 31.

20130507의 일기

#1. Arno

  기차역에서 Arno를 기다리는 중이다. 오늘 그의 집에서 1박을 하고 내일 함께 스위스로 떠난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와의 인연을 떠올려 본다.

  2012년 핼러윈, 서울 지하철 6호선, 이태원 클럽을 마다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무리에 그와 내가 있었다. 우리는 LOVE(LOng term Volunteer Experience) KOREA라고 불리는, 30여 명의 다국적 참가자들이 2~3명씩 팀을 이뤄 3개월간 지역 사회봉사 및 문화교류를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 중이었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 참가자들이 중간 평가를 위해 서울로 모인 오늘, 각국의 젊은이들은 이태원 클럽으로 향했다. 애늙은이던 나는 무려핼러윈의 이태원 클럽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여 이른 귀가를 선언했고, 그 이른 귀가팀에 Arno가 있었다.

  몇 번 마주한 적은 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기에 나는 그가 벨기에에서 왔다는 것, 화성 지역에서 봉사 중이라는 것 밖에는 딱히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일찍 귀가하던 그날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눴고, 의외로 대화 코드가 잘 맞았던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저녁으로 바베큐를 준비하는 Arno
Arno의 가족과 함께 한 저녁 식사

#2. 농담이 진짜가 되었다

  에어매트에 배를 깔고 엎드려 가계부를 정리하는 중이다. Arno가 먼저 자겠다며, 혹시 중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깨우란다. 단잠을 깨워도 된다고 하니 단잠을 깨울만한 상황을 설정해 보고 싶어진다.

  “시각은 새벽 2, 사유는 너무 추움정도면 될까?”

  “아니.”

  그 정도 이유로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담요를 하나 더 가져다주며 좀 더 serious 한 일로 깨울 것을 강조하는 그를 serious 한 일로 깨우겠다라며 안심시킨다.

  적막한 새벽, 잠에서 깼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 나의 생리현상은 Arno가 규정한 ‘serious’ 한 일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깨우지 않기로 한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긴다. 최대한 조용히 방문을 열고 화장실 위치를 떠올린다. 복도 반대쪽 끝에 하나, 아래층에 하나. 복도 반대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방을 지나야 한다. 계단 바로 옆에 있는 아래층 화장실로 가기로 한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신경 쓰여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

  도둑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둑고양이처럼 걸으려고 했을 뿐이다. 나 때문인 게 분명한, ‘라는 도둑이 들었음을 알리는 경보음이 온 집안을 깨운다.

  -’

  잠시 뒤 계단을 내려오는 Arno가 보인다. 경보음을 끄고 여전히 -’한 나를 다독이는 그에게 우물쭈물, 쭈뼛쭈뼛 그저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었다라고 고백한다. 세상 심각한 일로 그를 깨우고, 한껏 요란하게 화장실을 다녀와 확인해 본 시각, 새벽 2.

  농담이었는데, 농담이 진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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