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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141일 여행의 시작

서랍1-0) 여행의 시작

by 서랍 속 그녀 2020. 2. 8.

20130326의 일기

#1. 출발

  아빠는 여행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평소처럼 출근을 하셨다. 엄마는 나를 버스터미널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다. 버스로도 15분이면 가는 거리를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갔다. 터미널로 가는 길은 평소와 같았다. 그냥 무덤덤했고, 별일 없다고 느꼈다.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별안간 눈물이 났다.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내가 벌린 일이 어떤 일인지 실감이 났다. 여행 준비도 필요 없고, 떠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나는 사라지고, 멀어져 가는 엄마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만 남았다. 비행기 표만 들고 떠나겠다고 했던 나의 호기로움이 무색하게 온갖 걱정이 끊이질 않아 버스에서 내내 잠을 뒤척였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이 많은 짐을 어떻게 들고 다니지?’

부족한 여행 경비를 어떻게 아끼지?’

 

#2. 배낭여행 선배님

  고모가 서울역에서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될 때마다 인도로, 네팔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고모는 나의 배낭여행 선배님이다. 나의 첫 배낭여행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였고, 고모는 나와 오빠, 두 조카를 데리고 태국·캄보디아를 여행했다. 첫 해외여행이자 첫 배낭여행. 그곳에서 신세계를 경험하는 신비로움과 여행의 고난을 함께 배웠다.

  나의 두 번째 배낭여행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엄마와 함께 고모를 따라 인도로 갔다. 태국·캄보디아는 초호화 여행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배낭여행은 고난과 고생의 연속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에도 인도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너무 좋았고, 같이 사진 찍자고 다가오는 인도 사람들이 정겨웠고, 이색적인 풍경이 장관이었고,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이 되면 꼭 배낭여행을 다닐 거라고 다짐을 했었다.

  처음으로 혼자 장기 배낭여행을 떠나는 날, 배낭여행 선배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긴장되었다. 꼼꼼한 여행 준비의 대가인 고모가 비행기 표만 달랑 들고 떠나는 나를 질책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고모는 의외로 여행에 대해 많이 묻지 않으셨다. 그냥 친척끼리 나눌만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고, 안전하게 여행하라는 말씀만 해주셨다. 여행 베테랑인 고모가 나의 여행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대해주셔서, 여행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지 않으셔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긴장됐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3. 비행(서울-아부다비)

  다른 이유는 없다.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비행기 표가 가장 저렴했다. 자리를 잡고 짐을 정리하려는 찰나에 중년의 한국 아저씨께서 자리를 바꿔줄 수 없겠냐는 부탁을 해오셨다. 내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과 일행이라고 했다. 나야 굳이 그 자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기에 흔쾌히 자리를 바꿔 드렸다. 하지만 새로운 내 자리의 옆자리에는 풍채가 너무 좋은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기에 아뿔싸싶었다. 그 아저씨께 나의 자리를 침범당한 채 9시간 30분의 비행 내내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쪽잠을 잤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만 반복하던 나는 도착하기 30분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내가 조금 정신을 차린 걸 눈치챘는지, 옆자리 아저씨가 말을 걸어오셨다. “계속 자더라”, “어디서 왔느냐등등의 기본적인 대화가 오갔다. 아저씨는 나이지리아에서 오셨다고 했다. 그 분의 억양이 나에게는 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대화가 진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그 분은 나의 이메일 주소를 물어보셨고, 나도 메일 주소 쯤이야.’하며 주소를 건네드렸다.

 

#4. 메일 주소를 건네준 뒷이야기

  모로코마라케시에 있는 작은 숙소. 침대에 누워 열악한 인터넷 환경을 탓하며 애꿎은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클릭하고 있었다. 심심해서 아무거나 하나씩 클릭하다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지메일 앱에도 들어왔다. 그냥 메일함을 하나씩 열어보는데, 스팸 메일함에 비행기에서 만난~”이라는 메일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의 메일이 스팸 메일함에 들어있던 탓에, 나는 본의 아니게 한 달 만에 그분의 메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나이지리아 집에 잘 도착했다는 내용과 함께 비행기에서 나를 만나서 반가웠고, 즐겁고 안전한 여행을 하고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메일이 스팸 메일로 자동 분류되어 확인이 늦어진 점이 너무 미안하며, 지금은 모로코이고, 안전하게 여행을 잘하고 있다고,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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