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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식(食) - 급식인생 n년 차(feat. 편식하는 교사)

by 서랍 속 그녀 2020. 4. 26.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 부장 선생님의 뒤로 제가 세상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취나물 무침과 마늘종 볶음, 급식실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이토록 다른 이유입니다. 급식실 조리사님께서 취나물 무침과 마늘종 볶음을 식판 가득 담아 주셨지만, 그쪽으로는 젓가락이 단 한 번도 향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에게 급식은 저렴한 식비와 균형잡힌 식단으로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만, 교사 인생에 예상치 못한 난관이기도 했습니다. 매년 학생들에게 편식을 고백하지만 그렇다고 학생 앞에서 교사가 대놓고 편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에 학생과 함께 밥을 먹을 때는 싫어하는 반찬도 함께 먹는 괴로운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학생 없이 급식을 먹는 지금, 대놓고 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즐기는 중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멀리 떨어져 자리 잡은 옆 반 선생님께서 제 식판을 보더니 말씀하십니다.

  “자기, 나물 정말 안 먹어? 그럼 나 줘.”

  다른 선생님께서 말씀을 거드십니다.

 그렇게 편식해서 애들 급식지도는 어떻게 해?”

  그러게나 말입니다. 특히 초등에서 학교 급식은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상의 의미가 있기에 편식하는 식습관은 교사로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편식하는 교사이야기를 짧게 해보려고 합니다.

#1. 점심시간이 싫었던 초등학생

  깨끗하게 비운 식판을 선생님께 검사받는 것. 초등학교의 흔한 점심시간 풍경입니다. 너그러운 선생님께서는 싫어하는 반찬을 한 입만 더 먹는 것 정도로 봐주셨고, 아닌 선생님께서는 식판을 깨끗하게 싹싹 비워야만 보내주셨습니다.

  물컹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 버섯, 가지, 조개류를 먹지 않습니다. 비릿한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 미역 줄기 같은 해조류 무침을 먹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쓴맛이 나거나 질긴 각종 나물을 먹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리는 음식이 많으니 점심시간마다 선생님의 눈치를 보기 바빴더랬죠. 식판을 깨끗하게 비우라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몰래 반찬을 버리다가 혼나기도 하고, 입에 음식만 억지로 넣은 채 식판 검사를 받고 음식을 뱉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제게 점심시간이 즐거웠을 리가 없습니다.

#2. 편식하는 교사의 급식지도

  교사의 급식지도에 치를 떨던 아이가 커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급식지도를 받던 입장에서 급식지도를 하는 입장이 된 것이죠.

  급식지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위험 요소가 많은 점심시간에 학생이 다치지 않도록 살피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학생이 바른 식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 돌아다니지 않는 것, 밥을 먹으며 친구와 심한 장난을 치지 않는 것,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 등을 지도합니다.

  하지만 저는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을 지도하지 않습니다. 새 학년도가 시작되면 새로운 학생들과 급식 규칙을 정합니다만 식판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제 말에 환호성을 지르죠. 기대하지 못한 자유를 부여받은 학생들의 상기된 표정을 뒤로하고 저는 한껏 우울한 표정으로 짧은 연설을 합니다. 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편식하는 인생의 불편함’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덧붙입니다.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어떤 음식이든 한 입은 먹어보도록 시도는 하라고, 먹어보면 의외로 입에 맞는 음식일 수 있다고. 사실 제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인데요. 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식습관 지도를 하지 않는 점이 너무 찔릴 것 같아 교사로서 학생에게 앵무새처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맡은 학급에 급식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매년 학생들과 협의하여 약간의 조정이 이루어지기는 합니다만 대략 다음과 같은 선을 유지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밥을 남기지는 말 것

  맛있어서 다시 받아온 반찬은 반드시 다 먹을 것

  먹기 싫은 반찬은 한입 만 먹고 옆의 친구에게 확인받을 것

  물론, 저의 이런 급식지도에 대해 몇몇 학부모님은 아쉬워하시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는 안 먹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권유하면 먹을 텐데라는 생각과 안 먹어봐서 거부하는 거지, 먹어보면 좋아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더해진 것이죠. 그래도 권유의 탈을 쓰고 강요하고 싶지 않은데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점심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먹기 싫은 음식 한 입으로 그들의 점심시간이 얼룩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다음 해에는 다른 선생님 밑에서 올바른 식습관 지도를 받기 바랄 뿐입니다.

#4. 취나물 무침과 마늘종 볶음 그 후

  학년 부장님께서 피자를 시켜주셨습니다. 온라인 개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를 받고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요. 막상 온라인 개학이 시작되니 폭풍이 지나간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습니다. 반쪽짜리지만 온라인 개학을 해낸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와 막내인 제가 편식한다고 점심을 거의 먹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합쳐져 피자 파티가 되었습니다. 구운 옥수수 토핑을 얹은 피자가 맛있더군요.

  부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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