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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주(住) - 오늘은 이삿날입니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5. 9.

#1. 오늘은 이삿날입니다.

  적당히 헐렁하면서도 적당히 몸에 맞아 움직임에 걸리적거림이 없는 맨투맨과 넉넉하면서도 허리의 고무줄 밴드가 쫀쫀하여 쭈그려 앉기에 최적인 면바지로 구성된 전투복을 차려입고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하는 오늘은 바로 이삿날입니다.

  “, 선생님, 축하해요!”

  “부럽다, 진짜. 그것도 복이야!”

  새 학년도의 학년과 업무 발표가 있는 날, 바뀐 학급수에 맞게 조정된 교실 배치도가 또 다른 운명을 나눕니다. 같은 학년에 배정받아 교실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선생님, 혹은 학년은 바뀌었으나 교실 배치도 바뀌어 운 좋게 같은 교실을 계속 쓸 수 있게 된 선생님이 받는 부러움 섞인 인사말입니다.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교사들은 새로운 교실 배치도를 손에 들고 짐 언제까지 빼 드릴까요?”, “이사 언제 가면 될까요?”를 묻고 답하며 이사 날짜를 조정합니다. 새 학년도 교육과정 완성보다 급한 일, 바로 교실 이사입니다.

#2.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던 새내기 교사는

  업무 파일 두어 권이 짐의 전부였던, 노란 바구니 하나에 파일 두어 개만 담아 뽀짝뽀짝 걸음을 옮기니 이사가 끝났던 새내기 교사는, 전투복과 덴탈마스크로 무장한 선배 선생님들이 손수레 가득 종일 짐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미니멀리스트가 될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선배 선생님들이 이거 필요해?”, “이거 자기 줄게.” 하실 때마다 괜찮습니다로 고비를 잘 넘겨왔다 생각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새내기 딱지는 떨어지고 짐만 늘었습니다.

앞 줄은 제 짐의 일부, 뒷 줄과 시선을 사로잡는 책더미는 이사오실 선생님의 짐 일부입니다.
짐이 늘고 있는 또다른 이유, 보드게임. 작년 최고 인기 게임은 달무티였는데, 올해는 과연 어떤 게임이 인기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일단 버리고 보자며 책상에서, 책꽂이에서, 서랍장에서, 교실 이곳저곳에서 빼낸 짐을 보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버릴 게 없습니다. 버릴 게 없다맥시멀 라이프의 시작이라던데, 앞으로의 교직 인생이 두려워지는 순간입니다.

  치킨 11닭으로 졸업생 찬스를 얻어냈습니다. 이미 자기들의 5학년 때 담임 선생님,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이사를 도운, 담임은 아니었으나 옆 반 선생님이었던 제 이사까지 돕는 그들은 교실 이사 전문가입니다. 학원 시간이 남았다며 이사의 꽃인 먼지 뒤집어쓰며 대청소하기까지 함께 해준 그들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이사를 마쳤습니다.

  얘들아, 내년에도 어떻게 안 되겠니?

#3. 직업 만족도가 수직 상승 하는 순간

  교사가 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단골 멘트 3 대장이 있습니다.

  퇴근 빨리해서 좋겠다.

  연금 받아서 좋겠다.

  방학 있어서 좋겠다.

  뭐, 모두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꼽는 장점은 따로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이지, 그만두고 싶다가 목 끝까지 차오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뭐랄까, 나는 안전요원인가 교사인가 혼란스러울 때, 내가 하는 일은 보육일까 교육일까로 정체성이 흔들릴 때, 학생한테 치이고 학부모님께 치이고 업무 때문에 또 치일 때, ‘허리가 녹아내리게 공부해서 여기서 이러고 있구나싶어 우울해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쁘지 않다생각하며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바로 나만의 교실입니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고 난 뒤의 빈 교실, 그 넓은 공간에 혼자 남아 업무를 시작합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기분 따라 골라 듣는 음악은 덤입니다. 오며 가며 업무는 잘 하고 있나 들여다보는 상사도, 직장인의 미덕이라며 출퇴근 시간으로 눈치 주는 상사도, 오늘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괜스레 기분을 살피게 되는 선배도 없습니다. 지금 이 교실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유난히 학생들끼리 다툼도 많고 산만한 날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이라든가, 휴일을 앞둔 금요일이라든가, 체육이 든 목요일이라든가, 일찍 마치는 수요일이라든가, 괜히 화가 나는 화요일이라든가, 쉬고 돌아온 월요일이 있죠.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으로 6교시를 끝내고 학생들을 하교시키는 순간, 적막한 교실에 홀로 남는 그 순간, 직업 만족도가 수직상승 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 오늘도 버텼습니다.

  “정말 교실로 출근해서 교실에서 퇴근해요? 그럼 교무실은 언제 가요?”

  언젠가 한 중등 선생님께서 이건 정말 신세계라며 몇 번이고 되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곳에 남겨볼까 합니다.

 교무실은 복사하거나 찬물 마시고 싶을 때 가요.”

  오늘도, 내일도 교실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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