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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의(衣) - 왜 월요일에만 예쁜 옷 입어요?

by 서랍 속 그녀 2020. 4. 6.

#1. 선생님, 뭐 잊으신 거 없어요? - 2019년 1학기 어느 날

  5교시는 체육입니다. 급식을 먹고 양치 겸 화장실에 들르는 김에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기로 합니다. 갈아입은 치마는 세면대 옆 공간에 고이 올려두고 양치를 합니다. 마주친 학생들과 가벼운 대화도 나누고, 화장실 앞 복도를 전력 질주하는 학생들에게 강렬한 눈빛도 날리며 양치를 마칩니다. 몸도 마음도 상쾌하게 교실로 돌아와 TV 화면에 알림장을 띄우고 알림장을 적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시간표와 내일의 시간표, 학급일지를 참고하여 알림장을 적습니다. 찜찜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크게 잊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즐기려는데 한 학생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묻습니다.

  “선생님, 뭐 잊으신 거 없어요?”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5교시 체육 시간에 특별한 활동을 해주기로 했나? 알림장에 빠뜨린 내용이 있나? 숙제를 검사한다고 했었나? 머리를 빠르게 굴려보지만 떠오르는 내용이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어봅니다.

  “진짜 뭐 잊으신 거 없어요?”

  휴, 꼼꼼하지 못한 편입니다. '다 큰' 6학년의 집단 지성 덕분에 큰 구멍을 내지 않고 학급을 여기까지 운영해 온 것이 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잊었는지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나 뭐 잊었니...?”

  “진짜 모르겠어요?”

  “몰라.... 크게 잊은 건 없는 거 같은데...”

  그 학생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내밉니다.

  아뿔싸, 제 치마입니다.

  “이거 선생님 옷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어요?”

  할 말이 없습니다. ‘챙겨줌’과 ‘잔소리 덧붙이기’는 저의 역할이었는데,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민망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더 화장실에 옷을 두고 왔습니다. 이전 해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의식 어딘가에 ‘잊어도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라는 믿음이 박혔었나 봅니다. 두 번째 이후로는 학생들도 익숙한 듯이 한숨 한 번과 함께 옷을 건네주더군요.

  2020년에는 제가 벗어낸 허물은 제가 스스로 잘 챙겨보겠다고 다짐합니다.

#3. 선생님은 왜 월요일에만 예쁜 옷 입어요? - 2019년 2학기의 어느 날

  아마도 또 점심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는데 한 여학생이 ‘굉장한 걸 알아낸’ 표정으로 제게 다가오더니 묻습니다.

  “선생님은 왜 월요일에만 예쁜 옷 입어요?”

  “선생님이? 그런가...”

  “네, 제가 지난 몇 주간 관찰했는데 월요일에만 예쁜 옷 입고 오셨어요.”

  “00이가 생각하는 예쁜 옷이 뭔데?”

  “왜 있잖아요, 선생님 예쁜 무늬 그려져 있는 블라우스나 치마나 그런 거요. 오늘처럼 그냥 티셔츠에 바지 입는 거 말고요.”

  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일부러 월요일에만 예쁜 옷을 챙겨입는 것은 아니라고, 오해를 풀어주어야겠습니다.

  “아, 왜냐하면 화, 수, 목에는 체육이나 미술이 들었으니까. 옷 갈아입기 불편하거나 뭐 묻을 수 있잖아.”

  “아!”

  학생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고는 뒤돌아 갑니다. 아니, 뒤돌아 가는 줄 알았습니다. 잠시 멈추어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묻습니다.

  그럼 금요일은요?”

  앗, 들켰습니다.

  어? 아..... 금요일은... 아침에 유독 더 피곤해서...”

  머쓱하게 웃어 보입니다. 똑똑한 학생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똑똑한 학생인 줄은 몰랐습니다. 한 주 동안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리는 제 컨디션이 옷차림에 드러났나 봅니다. 앞으로는 금요일 옷차림도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2020년에는 1년 내내 기복 없이 꾸준한 옷차림을 선보이겠다고 다짐했건만, 제 다짐을 지켜봐 줄 학생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티셔츠에 면바지, 마스크 차림으로 출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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