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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영국

서랍2-3) 번외편 - 런던에서 길을 묻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2. 13.

#1. 영어 공부가 제일 힘들었어요.

  20101117. 나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고 있다. 수능을 하루 앞두고 마음이 심란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부랴부랴 알파벳을 외웠다. bd, pq를 구별하는 것이 난관이었다. 영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중학교 3년 내내 교과서의 모든 문장을 외웠다. 80점 대의 점수를 유지하며 간간이 90점도 넘겼다.

  고등학교 모의고사는 대비하기가 힘들었다. 교과서를 외우는 방법이 통하지 않아 뒤늦게 영어의 구조부터 공부해나갔다. 3등급 후반으로 시작해 꾸준히 성적을 올렸지만 3학년 마지막 모의고사까지 1등급을 받아보지 못했다.

  6년간 내 발목을 잡아 온 영어기에, 수능 하루 전까지 영어가 걱정이다. 걱정되는 마음과는 달리 영어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문제집은 덮고, 답지를 꺼내 든다. 영어 지문에는 잡다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외국어 영역 시간이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제일 어려운 문법 문제. 지문의 내용이 익숙하다. 어제 답지로 읽었던 그 내용인 것 같다. 지문의 내용이 파악되니, 답을 찾기가 한결 수월하다. 두어 문제를 더 그렇게 풀었다. 지난밤에 읽은 EBS 외국어 영역 300제 답지 덕분이다. 그렇게 인생 첫 영어 1등급을 수능에서 받았다. EBS 수능 연계의 수혜자인 셈이다.

#2. 드디어 입이 트였어요.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영어 동아리에 가입했다. 한 학기 동안 주말마다 5시간씩 영어 공부를 했다. 실력이 꽤나 늘었지만, 여전히 듣고 말하는 게 잘 안됐다.

  휴학을 하고 3개월 동안 시골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봉사를 했다. 외국인 봉사자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문화교류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나는 3개월 동안 벨기에에서 온 David와 핀란드에서 온 Minna와 함께 살았다.

  이홍기와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Minna 언니는 한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서로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쳐주고, 함께 미드와 한드를 봤다. 하루 종일 영어에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가 뜨이고, 후에 입이 트였다. 수능 공부로 단련되어 영어 문장의 기본 구조는 잘 알고 있었고, 단어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특정한 표현들이 입에 붙자, 그 표현의 틀 안에서 단어만 바꿔가며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봉사활동은 전국구 봉사활동이었고, 각 지역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봉사자가 와 있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함께 여행을 했고, 평가 기간에도 다 같이 만나서 어울렸다. 나는 십여 개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억양에 익숙해져 갔다.

#3. 그래서 제 영어 실력은요.

  당시 영어 원어민 친구들은 내 영어를 이렇게 평했다. 몇몇 발음이 부정확하지만(특히 ‘w’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would’2020년인 지금까지도 내가 발음을 잘못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전반적인 억양이 자연스럽다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에 특정 억양이 표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 억양이 누군가에게 알아듣기 힘든 억양은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나의 영어 실력은 여행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여행 얘기를 하며 친구를 사귈 수 있다. 눈을 맞추고 하는 일대일 대화 상황은 자신 있다.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내가 다시 말하면 되고, 내가 못 알아들으면 다시 말해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자신감의 문제다.

  다만 여럿이 어울리는 상황은 조금 힘들다. 말이 빨라져서 못 알아듣는 것도 있고, 문화 차이로 인해 저들이 왜 웃는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도 많다. 그래도 대화의 흐름은 놓치지 않는다.

#4. 길을 좀 물어도 될까요?

  버킹엄 궁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내셔널 갤러리로 향하는 길이다. 쉽게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길을 잃었다. 나는 10년을 산 집 앞에서도 종종 길을 헷갈리는 심각한 길치다. 결국 지나가는 경찰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Excuse me, I lost my way. Could you let me know where The National Gallery is?”

  두 명의 경찰관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다시 말해보란다.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단다. “The National Gallery”만 다시 말했다. 영어 원어민인 둘은 서로 갸우뚱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묻는다.

  “Do you speak English?”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는 영어가 아니었나 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의 영어 자신감은 한동안 바닥을 찍었다.

버킹엄 궁 근위병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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