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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영국

서랍2-2) 영국 런던 - 횡단보도를 건너는 방법

by 서랍 속 그녀 2020. 2. 12.

20130328의 일기

#1. 습관이라는 것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이다.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차가 점점 속도를 늦춘다. 나는 그 차가 천천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차가 멈췄고, 나도 멈췄다. 아무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 어색한 기다림 뒤 내가 먼저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는다. 차는 여전히 조용하게 멈춰 서있다.

  버스 정류장이다. 나는 기다리는 버스가 오는지 확인하기 왼쪽을 보며 서성이고 있다. 기다리던 버스의 뒤꽁무니가 점점 작아진다.

  보행자인 내가 지나가는 차를 먼저 배려하는 것, 왼쪽을 보고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 길을 건널 때는 왼쪽-오른쪽 순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모두 교육의 산물이겠지만 이제는 무의식적인 습관일 뿐이다. 버스를 타고, 길을 건너는 것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내가 이를 위해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이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영국의 새로운 교통 문화는 내가 나의 습관을 의식하도록 해주었다. 20여 년 동안 한국의 교통 문화에 최적화된 몸은 영국의 새로운 질서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차와 함께 멈춰 섰고, 엉뚱한 곳을 보며 길을 건넜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올바른 방향을 확인하며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영국을 떠났다.

#2. 언더그라운드

  런던의 언더그라운드는 좁다. 건장한 영국 성인 남자가 마주 앉으면 서로 무릎이 맞닿을 정도이다. 아, 살짝 과장을 보태봤다. 길 안내도 직관적이지 않아 환승을 하거나 역을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놀랍다. 1863년에 런던의 첫 언더그라운드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1863년, 조선에서는 고종이 즉위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차례로 겪고, 조선이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영국에서는 땅속으로 언더그라운드가 다니고 있었다.

#3. 베이커가 221B

셜록 홈즈. 베이커 스트리트 221B

  셜록 홈스를 좋아했다. 팬이라고 말하기는 부족하고, 어린 시절 '한때 푹 빠져있었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셜록홈스를 다시 읽어보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한때 즐겨 읽었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셜록 홈스 박물관으로 향했다. 무던한 마음으로 향한 곳이었으나 관람객 줄이 길어서, 다들 한껏 들뜬 게 눈에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마치, 나도 홈스의 모든 것을 꿰고 있는 팬인 것처럼.

  홈스와 왓슨의 방. 벽난로와 그 앞에 놓인 의자 두 개. 홈스와 왓슨은 여기에 나란히 앉아서 사건 얘기를 했겠지. 어딘가 어수선하면서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마음이 들었다. 옛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홈스의 모든 것을 꿰고 있는 팬은 아니었기에, 다른 관광객이 흘리는 정보를 귀동냥해야 했다. 아, 여기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방이구나. 아, 저기는 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방이구나. 홈스의 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셜록 홈스를 한 때 읽어본 사람, 그들은 셜록 홈스를 사랑하는 사람.

  후에 BBC 셜록홈즈를 보면서 뒤늦게 이 장소를 다시 떠올렸다. '어, 저기! 저 근처 내가 가봤지, 훗'하는 만족감에 흐뭇해졌다. 사실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장소는 아니었는데, 입장료 8£가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떠올리니 이곳이 굉장히 좋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의 추억은 이렇게 미화된다.

#4. 비어 있는 일기

  20130328의 일기는 '뒤늦게 쓰는 여행 일기 : 2014. 5. 16'로 시작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런던을 둘러 본 첫날이기에 당연히 일기를 남겨놓았을 줄 알았다. 20140516의 나도 이 날의 일기가 남아있지 않아서 의외라고 적고 있었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다가, 비어 있는 일기를 보고 기억을 더듬어 일기를 썼나 보다. 야경투어를 다녀와 민박집 사람들과 생강차를 끓여마시고 잠들었다고 되어 있다. 야경투어 후 몸이 피곤해서 그냥 잤나 보다.

  비어 있는 일기가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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