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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일상) 그가 '뿌잉'이라고 했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11. 4.

#1. 사건의 발단

  점심시간. 학생들을 데리고 밥을 먹는 중이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는데 식사를 마친 연구 부장님께서 내 옆자리에 와서 앉으셨다.

  그녀는 내가 첫 담임을 맡았던 해 나의 학년 부장님이셨다. NEIS(나이스, 교육행정 정보시스템)N자도 모르는 햇병아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담임 업무를 볼 수 있게 하셨고, 그렇게 그녀의 밑에서 자란 나는 4년이 지난 지금 학교 전체의 NEIS 시스템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학교의 어엿한 일꾼으로 자라나는 나를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녀는, 그녀의 첫 제자보다도 나이가 어린 나를 많이 예뻐해 주신다.

  한동안 계속 바빴다. 어제도 퇴근 직전까지 종종거리며 뛰어다닌 내가 그녀는 내심 안쓰러웠나 보다. 위로의 말을 전하는 그녀에게 밥을 오물거리느라 말은 하지 못하고 괜찮다라는 의미로 ‘V’를 해 보인다.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내적 친분이 100에 수렴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보이는 필살기 표정과 함께.

  ‘V’ 때문에 한쪽 눈이 가려진 와중에 내 앞을 지나가는 한 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하는 소리를 애써 삼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는 서둘러 내 앞을 지나갔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반의 재간둥이이다. 말과 행동에 재치가 있어 학급 분위기를 밝게 이끄는 그런 학생. 재치는 넘치나 야무짐은 없어서 잦은 훈육을 받는, 그러나 그 모든 훈육을 구김 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학생. 그런 그가 나의 귀(여운)척을 봐버렸다. 하필이면 일과 중 유일하게 마스크를 벗고 있는 지금.

#2. 사건의 전개

  급식을 먹고 개별적으로 하교한다. 원래라면 그렇다. 하지만 19명 중 13명에게 하교 불가를 선언했다. 온라인 학습일에 작성한 배움공책이 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식 후에 하교하지 말고 배움공책을 다시 검사받도록 했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와 보니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빨리 검사를 해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한 명씩 재검사를 시작한다. 나의 표정, 손짓 하나에 하교 운명이 걸려있는 만큼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내 입에서 나오는 통과이 한 마디가 너무나 간절한 그들이다. 이게 뭐라고, 교실 내에 긴장감이 감돈다.

#3. 사건의 절정

  그가 공책을 내민다. 2학기 들어서 눈에 띄게 발전한 그다. 1학기에는 내용이 빈 배움공책을 제출만 해줘도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는데, 어느새 역시 통과로 불리는 무리에 껴 있다. 오늘도 그는 잘해 왔다. 다만 0.2% 부족한 그 부분을 채워주고 싶어서 남겼다.

  급식실에서의 일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도도한 표정으로 공책을 받아든다. 부족한 0.2%를 잘 채워왔다. 통과를 외친다. 나의 통과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을 얼굴에 갖다대고는 응답한다.

  “뿌잉

  하, 귀여운 짜식.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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