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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일상) 카페인 청정구역이 무너지다

by 서랍 속 그녀 2021. 1. 5.

#1. 따뜻한 모카면 얘기가 다르지.

  방학을 맞이하여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중이다. ‘그래도 9시에는 일어나야지하며 맞춘 알람을 10분씩 늦추다 보니 어느덧 10, 그래도 일어나기가 싫다. 아직 침대와 한 몸인 내게 잠시 어딘가를 다녀온 듯한 오빠가 묻는다.

  커피 한잔할래?”

  “나 커피 안 마시잖아.”

  “따뜻한 모카면 얘기가 다르지.”

  “뭐래.”

#2. 내 몸은 카페인 청정구역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는 맥심을 즐겨 마셨는데, 언제부턴가 커피를 마시고 난 후의 텁텁한 느낌과 원두 냄새가 싫어졌다. 그렇게 커피를 끊은 지 어언 10. 평균 섭취량은 1년에 한 잔 정도. 정말 거절하기 힘들 때 한 모금씩 마신 결과다.

  고등학생 시절, 쉬는 시간에 맥심 한 잔을 마시면, 자습 시간에 그렇게 잠이 잘 왔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맥심 한 잔은 꿀잠을 자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커피를 끊고 나니, 소량의 카페인 섭취만으로도 몸이 과하게 반응했다. 오후에 마신 홍차 한 잔에 새벽 3시까지 눈이 말똥하다든가 하는.

  다들 카페인의 노예로 산다는 수험생활도, 직장생활도 카페인 없이 버텨왔다. 사실, 버텨왔다기보다는 아무리 피곤해도 지금 내 몸이 카페인을 원한다라는 느낌 자체를 받아본 적이 없다. 딱 하루 빼고.

  얼마 전, 작지만 큰 놈이자 어린놈이 입대를 했다. 직장생활 50개월 만에 처음으로 학기 중 연가를 쓰고 부모님을 대신하여 동생을 강원도까지 바래다주던 날, 돌아오는 길에 내 몸이 울부짖었다.

  지금 나는 카페인을 원한다.

  그날, 처음으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강력한 카페인 주입 덕분에, 강원도를 왕복했음에도 4시간 동안 이어진 대학원 수업을 버텨냈다. 너무 강력했던 나머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좀비처럼 출근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아무튼, 내 몸은 카페인 청정구역이다.

#3. 카페인 청정구역이 무너지다

  마지못해 받아든 따듯한 모카 한 잔을 들고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홀짝홀짝 마시는데 맛이 괜찮다. 노트북을 켜고, 하루를 시작한다. 잠시 뒤, 오빠가 모카 맛 좀 보자며 자기가 마시던 헤이즐넛을 내민다. 모카를 받아들더니 하는 말.

  뭐야, 다 마셨네.”

  “ㅋㅋㅋㅋㅋㅋㅋ(머쓱한 웃음과 함께) 맛있네. 왜 두 잔이나 사 왔어?”

  “카페 사장님이 너무 울상이셔서. 이 집 커피가 괜찮아.”

  머쓱한 웃음을 이어가며 왜 사람들이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지 알 것도 같다는 변명을 덧붙인다. 이렇게 카페인 청정구역이 무너지려나 보다.

#4. 뒷이야기

  대화를 이어간다. 내가 물건을 사는데 주문은 오빠가 하고, 오빠가 받게 될 포인트는 반으로 나누고, 현금영수증은 내 번호로 하자는 모종의 거래가 오간다.

  , 근데 나 오늘 잔고증명서 떼서 계좌 하루 묶임.”

  대충 유학을 준비 중인 오빠가 대학에서 요구하는 잔고증명을 하기 위해 여러 통장의 돈을 한 곳으로 끌어모았고, 그래서 오늘 주문이 불가하다는 뜻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영끌(‘혼까지 어모으다의 준말)해서 잔고 잘 맞췄어?”

 , 내가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돈은 많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평생을 학생으로 산 오빠의 자산 규모를 의심하는 직장생활 만 52개월 차 동생의 코웃음이다.

  돈이 많아?”

  배꼽을 잡고 웃으며 재차 확인한다. 힘겹게 웃음을 멈추고 이 상황이 웃겨서 오빠에게 묻는다.

  “오빠 돈 많은 거 블로그에 써도 돼?”

  “? , 그래. , 크지만 작은놈? 뭐야, 작지만 뭐? 늙은 놈이 돈 많다고 써줘.”

  그래서 적는다.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연 오늘, 늙은 놈이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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