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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모로코

서랍6-14) 모로코 페스 - 눈을 떠보니 식당이었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10. 1.

20130502의 일기

#1. 눈을 떠보니 식당이었다.

  깊은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Hi, good morning!”

  눈이 마주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머쓱한 듯. 테라스에서 눈을 뜨는 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하룻밤을 보낼 테라스가 본디 식당이라는 얘기는 어제 숙소 직원에게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이 장소가 식당이라는 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이 되지 않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이제 그 문장이 가지는 의미를 알겠다. 잠은 테라스에서 잤지만, 눈은 식당에서 뜬다는 것. 나에게는 침대인 소파가 그들에게는 식당 의자라는 것. 침대였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를 의자 삼아 앉고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식당에서 눈을 떴다는 건, 아침의 굶주림을 누구보다 빨리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닥, 타닥. 빗방울이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모로코에 도착한 지 10여 일 만에 처음 만난 비다. 마침 테라스에서 1박을 하는 오늘. 테라스 천장을 바라보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그 느낌이 좋았다. 낭만적이었달까.

  주어진 이불이 따뜻해서 춥지는 않았다. 몸은 따뜻하고 얼굴은 약간 시린 듯한 그 정도. 모든 것이 적당해서 깊은 잠을 잘 잔 오늘,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테라스에서 먹는 아침 식사. 지극히 모로코스러운 메뉴다.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면 보이던 풍경
이런 풍경을 보다가 메디나 밖으로 나서면 자동차가 쌩쌩 달리니,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2. 악명높은 골목길을 대하는 자세

  모로코 여행은 메디나(Medina, 구시가지)로 요약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메디나를 여행하다 보면, 메디나 밖으로 나왔을 때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메디나 벽을 사이에 두고 시간의 흐름이 나뉘는 것 같아서랄까. 신시가지를 가득 채운 현대식 쇼핑몰과 차, 고층건물이 왠지 낯선 그런 기분.

  아무튼, 아실라, 마라케시를 거쳐 세 번째 방문한 이곳 페스(Fes)의 메디나는 다른 곳의 메디나보다 유독 미로 같은 길로 유명했다.

  애초에 어디를 찾아가겠다는 목표는 고이 접어두었다. 그냥 걸을 생각이었다. 귀에 들려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하염없이 걷다가 숙소로 돌아갈 때만 미리 받아놓은 숙소 명함을 내밀며 물어물어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걷고 있었다.

  그 꼬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3.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여행객의 길을 막아서고 돈을 요구하는 그들은 이 악명높은 골목길의 길잡이다. 여행객에게 길을 찾아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우리나라 나이로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누가 봐도 초등학생 그 이상은 아닌 꼬마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나에게도 한 꼬마가 달라붙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도움은 필요 없다는 내게 이번에는 가죽염색 공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 안내할 테니 팁을 달란다. 페스는 가죽염색으로 유명하다. 메디나를 거닐다가 스치게 된다면 가죽염색 공장도 둘러보려고 했다. 꼭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지나가다 보이면가보려던 정도. 성인이었으면 필요 없다며 내쳤을 텐데 꼬마라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이 꼬마 아이한테 돈을 건네도 될 일인지 모르겠다. 학교는 다니고 있는 건지, 이렇게 번 돈은 누구한테 가는 건지 모르겠다.

  우물쭈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나와 달리 그 꼬마는 과하게 당당했고, 건들건들했다. 반쯤 끌려가다시피 꼬마가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었고, 어느새 나는 돈을 요구하는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길을 안내했으니 팁을 달라는 꼬마 아이, 가죽염색 공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 출입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 염색 공장을 배경으로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역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상대가 너무 어려 냉정하게 내치지 못해 끌려왔는데 이번에는 꼬마 보다 네다섯 살 많아 보이는 소년들이 날 둘러싼 게 어이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너희들이 한 팀이구나.’

  그러나 어쩌랴. 보아하니 다른 곳도 비슷할 거 같은데, 그냥 여기를 슬쩍 둘러보기로 한다. 사진은 필요 없다며 내치고, 다른 둘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넨다.

  어딘가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가죽염색 공장은 그저 코끝이 찡해오는 냄새만 진동했을 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찜찜한 기분 탓인지, 냄새 탓인지 이곳이 영 별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처럼 색이 선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쓱 보는 듯 마는 듯 뒤를 돌아 나온다.

  학교가 아닌 이곳에서 여행객을 상대하는 골목을 가득 채운 어린이들의 모습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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