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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아이슬란드-로드트립

서랍5-3) 아이슬란드 - 사실이 아니기를, 망상이기를

by 서랍 속 그녀 2020. 3. 29.

20130418의 일기

#1. 밤사이 이곳은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밤을 보낸 사이,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1번 국도의 어느 곳, 소복이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새하얀 눈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황홀했다. 이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곳에, 이미 깔끔하게 제설 된 도로만이 누군가 먼저 이곳을 다녀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 한 편에 차를 세우고, 새하얀 눈밭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보기로 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도로 한 편에 차를 세웠다. 드넓은 눈밭이 모두 우리의 것인 양 눈밭을 헤집었다.
아이슬란드의 자연온천. 온천 옆의 오두막은 옷을 갈아 입을 수 있는 탈의실이다. 물론,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2.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고, 자연온천을 즐기며 평화를 만끽하던 우리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Jono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의 짜증 섞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덴마크인 아주머니는 차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것도 아무 곳이 아니라 공동묘지에.

  어제부터 덴마크인 아주머니는 자주 차를 멈춰 세웠다. 한 번은 트렁크에 넣어둔 가방에서 초콜릿 바를 꺼내겠다며 차를 세워달라기에, 내가 나의 간식을 나눠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차를 세울 것을 고집하기도 했다. 그녀의 잦은 요구는, 운전자인 Jono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공동묘지가 나오면 차를 세워 달란다.

  납치를 당했었다고 했다. 갖은 고문 끝에 힘들게 풀려났단다. 자기가 당장 공동묘지의 모래를 떠서 레이캬비크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 언니가 위험해진단다. 납치되어 의자에 팔이 묶인 채 고문을 당하는 건 괴로운 일이라며, 자기는 그 고통을 다시 겪을 수 없으며, 자기 언니가 그런 고통을 겪도록 둘 수 없다고 했다.

  난데없는 납치, 고문, 공동묘지의 등장은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속사포로 쏟아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도대체 나는 왜 저런 단어를 영어로 알고 있는가에 대해 잠시 의문을 품으며, Jono의 눈치를 살폈다.

  Jono는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공동묘지에 차를 세우는 건 안 될 일이며, 더군다나 누군가의 묘지에서 흙을 푸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덴마크인 아주머니와 Jono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결국은 Jono가 두 손을 들었다. ‘정상적인대화가 되지 않는 그녀와의 대화를 포기한 셈이다.

  1번 국도를 달리면 심심치 않게 공동묘지가 눈에 보이고는 했다. 우리는 모르지만,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도로를 달렸다. 그 공동묘지에 우리 차를 세우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 한 편에 다시 차를 세우고, 공동묘지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멍하게 바라봤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그녀를 살피며, 도대체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망상일까에 대한 각종 추측을 나눴다. 어느덧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하나, 둘 입을 다물었다.

  다시 1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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