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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아이슬란드-로드트립

서랍5-5) 아이슬란드 - 눈보라에 맞서는 남자

by 서랍 속 그녀 2020. 4. 12.

20130419의 일기(1)

#1. 평정심 유지의 중요성

  순식간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하늘은 급변했고, 우리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에 갇혔다. 산 중턱의 어딘가, 길을 이탈하면 차가 전복될 수 있는 그 어딘가. 도로의 경계를 알려주는 희미한 황색 막대를 이정표 삼아 거북이보다 느리게 차를 움직이는 중이다.

  산으로 진입하기 전 충분히 날씨를 확인했다. 인터넷으로 날씨를 확인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새로운 차를 빌리면서도 사장님께 산을 통과해도 되는 날씨일지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모두가 오늘 날씨는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진입했다. 하지만 이곳 섬나라의,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날씨가 심술궂은 변덕을 부리며 눈보라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이방인인 우리가 그 변덕을 정면으로 마주할 재간은 없었다.

  차를 멈출 수는 없다. 차를 잠시만 멈춰도 차가 금방 눈에 파묻힐 수 있으니까. 무작정 차를 움직일 수도 없다. 도로를 이탈하면 차가 전복될 수도 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리가 눈에 파묻히거나 차가 전복되면 누가, 언제, 어떻게 우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당연히 핸드폰 신호는 잡히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문자라도 남길까 하는 고민이 순간 머리를 휩싸는데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왔다.

  운전대를 잡은 Jono의 콧노래였다. 한 손에는 운전대를, 한 손에는 지난밤 이후 공식 커플이 된 Steffi의 손을 꼭 잡은 그는 별일 없다라는 듯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찬가지로 Jono의 손을 꼭 잡은 Steffi는 다른 손으로 정말 희미하게 보이는 황색 막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착한 Steffi의 안내에 따라 Jono는 차를 움직였고, 그 둘의 침착하면서도 여유로운 태도는 우리의 마음도 가라앉혀주었다. 무엇보다 JonoSteffi의 안내를, SteffiJono의 운전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그런 둘의 모습은 뒤에 앉은 우리에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차 안에 잠시나마 안정이 찾아왔다.

눈보라가 시작되기 전, 저 하늘은 어쩌면 우리에게 눈보라를 예고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슬란드의 흔한 폭포
벽이라고 말해주세요, 눈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2. 눈보라에 맞서는 남자

  나 또한 내 두 손을 맞잡고 JonoSteffi의 이끎에 운명을 맡긴 채 눈보라가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눈보라는 점차 심해졌다. 침착하게 하나, 하나 황색 막대의 방향을 가리키던 Steffi가 처음으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제는 정말 황색 막대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퀴의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다는 Jono의 말에 우리 모두 발을 동동거리는데 일본인 A가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눈보라에 맞서는 남자

  성큼성큼 차 앞으로 향한 그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선 채 길 안내를 해주었고, 차는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190cm의 키와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거센 눈보라를 오래 맞서게 둘 수는 없었다. 경적으로 그를 불러 세우고 이번에는 내가 눈보라에 맞서 보기로 했다.

  ‘태권도 동아리 활동 및 태권무 공연 경험 다수. 10kg 가방 메고 하루 32km 행군 경험 있음.’ 나름강인함을 자랑하는 나였지만 눈보라 앞의 나는 한없이 나약한 종잇장에 불과했다. 내가 내딛고자 한 발은 땅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고,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결국, 내가 헛발질을 하는 사이 아주 잠깐 몸을 녹인 일본인 A가 다시 바통을 이어받았다.

  일본인 A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눈보라는 언제쯤 그칠까.

  우리가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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