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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행 이야기/모로코

서랍6-6) 모로코 마라케시 - 일본 사람 아닙니다.

by 서랍 속 그녀 2020. 7. 7.

20130427의 일기

#1. 여기는 마라케시

  한적하고 조용하던 여행이 끝났다. 온 감각이 북적북적함을 느끼는 중이다. 여기는 마라케시(Marrakech). 광장을 에워싸고도 모자라 골목골목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없는 것 빼고 다 있을 것 같은 시장과 오렌지 주스로 유명하다. 모로코는 원래 오렌지 주스로 유명하지만 유독 마라케시의 오렌지 주스가 명물인 이유는 광장 중앙에 모인 수십 개의 오렌지 주스 가판대 때문이다. 전반적인 물가는 다른 도시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오렌지 주스만큼은 어디보다 싸다. 시장을 구경하다 No. 35 가판대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사 마신다. 더운 여름, 오렌지의 상큼함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인파 가득한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광장 밖에서도 느껴지는 북적북적함
매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더 북적북적해진다.

#2. 일본 사람 아닙니다.

  지친다. 날씨 때문도 북적북적한 인파 때문도 아니다. 골목골목 매대를 구경하는 데 쉼 없이 걸려오는 말 때문이다.

  “Japanese?”

  혹은

  “Konnichiwa!”

  과장 안 보태고 세 걸음에 한 번씩 듣는 중이다. 처음에는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나름의 응답을 해주었지만, 점점 짜증이 쌓여 이제는 귀를 닫았다.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짜증이 나지 않는다를 되뇌며 뜻밖의 마음 수양 중이다.

#3. 갑자기 분위기 차 한잔

  누군가 또 내게 말을 걸어온다. 역시나 “Konnichiwa!”로 인사를 건네는 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를 되뇌며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뒤에서 나의 손목을 잡아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잡힌 손목에 이끌려 뒤를 돌며 사납게 째려본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의 손목을 함부로 낚아채면 상대가 화날 수 있다는 건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지 나의 분노 가득한 눈빛에 당황한 듯했다. 그의 당황한 눈빛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그를 몰아세운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에게 외형만 보고 아시안이라고 짐작한 것, 아시안은 다 일본인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굳이 영어도 아닌 일본어로 알은체한 것, 함부로 내 몸에 손댄 것 등에 대한 분노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은 “Konnichiwa!”로 인한 짜증이 그로 인해 폭발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나를 이만큼이나 화나게 한 것에 놀란 듯했다.

  어찌 됐든, 내게 “Konnichiwa!”를 건넨 모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내뱉고 다시 길을 가려는데, 그가 다시 나를 불러세우며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요새 일본인 여행객이 유독 많아서 한 실수며,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손목을 잡았다고 했다. 전혀 납득이 가는 이유가 아니었지만, 나름 사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사과를 받고 길을 나서는 나를 그가 다시 불러세웠고, 자신의 가게에서 차 한잔하고 가라고 했다. ‘갑자기 분위기 차 한잔?’ 싶었지만 미안하다를 연발하는 그를 내치지 못했다. 골목을 향해 뚫려있는 작은 매대 형식의 가게였기에, 길목에 앉아 차를 한잔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건네는 차를 마셨고, 그의 가게를 구경했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는데 화장품 가게라고 했다. 고개를 돌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내게 보여줄 게 있다며 뭔가를 꺼내온다. 꼭 흙으로 만든 냄비 뚜껑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것을 내밀더니, 이게 뭔지 짐작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야말로 멀뚱멀뚱.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정말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실컷 즐긴 후에야 답을 말해주었다.

과연 이 물건의 정체는?

  그 물건의 정체는 바로 모로코의 전통 화장품. 그의 설명에 따라 침을 살짝 묻혀서 표면을 문지르니 손에 붉은 색이 묻어 나왔다. 손에 묻어 나온 색을 눈이나 볼, 입술에 바르면 화장 끝.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바라 신기함을 연발하는 내게 그가 모로코에 온 기념이라며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Konnichiwa!”로 시작된 악연은 실랑이를 거쳐 차 한 잔과 함께 화장품 선물로 끝이 났다.

  사람 일 모르는 거라더니, 아무튼. 낯선 모로코 전통 화장품을 고맙게 받아들고 다시 인파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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