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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7-1) 프랑스 파리 - 지갑이 사라졌다. 20130505의 일기 #1. 지갑이 사라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 파리 시내의 한 지하철역이다. 12시간 넘게 이동을 한 지금, 피곤함보다 긴장감이 앞선다. 깜깜한 새벽에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메고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빨리 숙소에 도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찰구를 지나기 위해 지갑을 찾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던 그 지갑이 손에 닿지 않는다. 어? 보조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옷 주머니를 살핀다. 앞으로 멘 가방을 살핀다. 다시 거꾸로 앞으로 멘 가방을 살핀다. 옷 주머니를 살핀다. 보조 가방을 뒤진다. 사라졌다, 내 지갑이. 지금, 이 순간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지갑 안에 지하철 표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더 당혹스럽다. 무임승차로 오해받아 벌금을 물게 .. 2020. 12. 27.
서랍6-15) 모로코 셰프샤우엔- 파란 나라를 보았니? 20130504의 일기 #1. 파란 나라를 보았니?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희망이 가득 찬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꿈과 희망이 가득 찬 파란 나라가 실제 한다면 분명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일명 블루시티(blue city)로 불리는 이곳은 셰프샤우엔(Chefchauen), 어느덧 모로코 여행에서의 마지막 도시이다. 모로코 도착 첫날, 겁에 질려있는 나와 함께 저녁을 먹어 주었던, Police라 굳게 믿었으나 Police가 아니라 Polish였던 그 커플이 가장 기대된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나온 모로코의 많은 도시는 채도가 낮았다. 어느 곳에서든 어느 색이든 묘하게 ‘사막의 색’이 더해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밝고 톡톡 튀는 느낌보다는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하지.. 2020. 12. 26.
일상) 그가 '뿌잉'이라고 했다. #1. 사건의 발단 점심시간. 학생들을 데리고 밥을 먹는 중이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는데 식사를 마친 연구 부장님께서 내 옆자리에 와서 앉으셨다. 그녀는 내가 첫 담임을 맡았던 해 나의 학년 부장님이셨다. NEIS(나이스, 교육행정 정보시스템)의 N자도 모르는 햇병아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담임 업무를 볼 수 있게 하셨고, 그렇게 그녀의 밑에서 자란 나는 4년이 지난 지금 학교 전체의 NEIS 시스템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학교의 어엿한 일꾼으로 자라나는 나를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녀는, 그녀의 첫 제자보다도 나이가 어린 나를 많이 예뻐해 주신다. 한동안 계속 바빴다. 어제도 퇴근 직전까지 종종거리며 뛰어다닌 내가 그녀는 내심 안쓰러웠나 보다. 위로의 말을 전하는 그녀에게.. 2020. 11. 4.
서랍6-14) 모로코 페스 - 눈을 떠보니 식당이었다. 20130502의 일기 #1. 눈을 떠보니 식당이었다. 깊은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데,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Hi, good morning!” 눈이 마주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머쓱한 듯. 테라스에서 눈을 뜨는 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하룻밤을 보낼 테라스가 본디 식당이라는 얘기는 어제 숙소 직원에게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이 장소가 식당이라는 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이 되지 않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이제 그 문장이 가지는 의미를 알겠다. 잠은 테라스에서 잤지만, 눈은 식당에서 뜬다는 것. 나에게는 침대인 소파가 그들에게는 식당 의자라는 것. 침대였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를 의자 삼아 앉고 자연스럽게 아침 .. 2020. 10. 1.
서랍6-13) 모로코 페스 - 제가 한 번 자보겠습니다, 테라스에서 20130501의 일기 #1. 사막의 아침 별똥별 쏟아지던, 낭만 가득했던 사막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일몰을 보며 들어간 사막을 일출을 보며 나왔다. ‘아, 화장실’ 또다시 낙타의 등에 기대 터덕터덕 사막을 빠져나오는 내 기분이다. 장장 12시간 넘게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했다는 현실이 내 생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감상을 이겼다. 민트향 가득 뿜은 양치, 몸 구석구석 자리 잡은 모래알을 뽀드득뽀드득 씻어낼 수 있는 샤워, 그리고 무엇보다 화장실 그 자체. 너무 간절하다. 사막과 헤어지는 지금, 나는 무엇보다 화장실이 간절하다. #2. 제가 한 번 자보겠습니다, 테라스에서 141일의 여행에 ‘계획’도, ‘정보수집’도 없다. 장기 여행인지라 계획을 세우려면 끝도 없을 것 같.. 2020. 9. 4.
서랍6-12) 모로코 사하라사막 - 이것이 바로 사막의 낭만 20130430의 일기(3) 앞 이야기 : 20130430의 일기(1) / 20130430의 일기(2) #4. 대자연의 본모습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등산도 좋고, 계단 오르기도 좋다. 오를 때 살짝 숨이 차는 것도 좋고, 오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그 풍경도 좋다. 각 여행지에는 전망을 보기 좋은 명소가 있다. 언덕 위의 공원일 때도 있고, 성당의 첨탑일 때도 있다. 웬만하면 다 올라보려고 한다. 깊은숨을 내쉬며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게 좋다. 이곳 사막에서는 잘 모르겠다. 이미 어둑해진 이곳, 불빛이라곤 텐트 밖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전부인 이곳에서 언덕을 오른다고 무엇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르라니 올라본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인지라 몇 걸음 오.. 2020. 8. 23.
서랍6-11) 모로코 사하라사막 - 무엇이든 답변해 드립니다. 20130430의 일기(2) 앞 이야기 : 20130430의 일기 (1) #3. 무엇이든 답변해 드립니다. 사막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하룻밤을 보낼 텐트를 등지고, 간이 테이블에 앉아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느새 해가 져 어둑어둑한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화장실 따위는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물을 마시면 안 된다’와 ‘아, 참! 마실 물도 없지’,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떡하지?’를 고민하는데, 건너편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내게 관심을 보여왔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사람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한국인 Q&A 응답 전문 여행객으로서, 이번에는 어떤 질문일지 궁금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2020. 8. 6.
서랍6-10) 모로코 사하라사막 - 낭만적이기보다는 현실적 20130430의 일기 #1. 안녕, 사하라사막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달렸다. 계속된 이동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때쯤, 흐리멍덩한 눈으로 마주한 사하라사막.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짠! 여기부터 사하라사막이야.’라는 표지판을 기대한 건지, 사막 시작을 알리는 장승이라도 서 있기를 기대한 건지. 아무튼, 아무런 표식 없이 어느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사하라사막이 얼떨떨했다. 아, 이게 교과서로만 보던 그 사하라사막이구나. 너를 보기 위해 이제껏 달려왔구나. 차에서 낙타로 옮겨 탔다. 터덜터덜 낙타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지평선 너머에 시선을 둔다. 일몰이 사막을 감쌌다. 오늘 밤, 이곳에서 사막 하늘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보낸다. #2. 낭만적이기보다는 현실적 사하라사막은 아름다웠다. 모래에 반사된 일.. 2020. 7. 31.